A. 나는 대학 시절에 남자친구들과 몰려다니는 것보다, 여학생들과 만나서 대화 나누는 것을 더 좋아했던 것 같아. 내가 주는 모습이 괜찮았던지, 여학생들을 쉽게 사귈 수 있었던 것 같아. 대학 1년 후배였던 여학생과 4년 정도 사귄 적도 있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결국 헤어질수밖에 없었어.
미국에 가기로 결정한 후, 낯선 이국땅에서 혼자 살 것을 생각하니 외로울 것 같았어. 마침 그 때 어느 여성을 소개 받았는데, 내가 무슨 얘기를 하면 아무 말 없이 얼굴이 붉어지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여성이었어. 이 전에 내가 만났던 여자들은 친구같이 편하게 지냈었는데, 이 여성을 본 순간 ‘결혼은 이렇게 여성스럽고 순종적인 여자하고 해야 돼.’ 라고 생각되어 한 달간 데이트 한 후에 약혼식을 하고 난 후, 먼저 미국에 들어갔어.
1년 후, 약혼녀가 대학을 마치고 미국에 들어왔는데, 막상 같이 생활을 하다보니까 부모님과의 갈등, 경제생활 등 여러 문제들로 부딪히기 시작했어. 자기 잘못은 좀처럼 인정하지 않고 너무 고집이 세서 말이 잘 통하지 않았어.외동딸이라 부모님의 손에서 곱게 자라서 요즘 말하는 ‘공주과’였던 거야.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서, 특히 우리 부모님께서 많은 상처를 입으셨고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았어. 힘든 결혼생활을 하면서 ‘편하고 대화가 되는 아내’를 얼마나 원했는지 몰라.
헤어지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적어도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에, 오직 일에만 전념했어.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 노릇도 제대로 못했고, 이혼으로 큰 상처를 주고 말았어. 지금은 아이들이 모두 나를 이해하고 친구같이 잘 지내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미국에서는 이혼할 때 전 재산의 반과 양육권은 엄마에게 주어져서, 경제적인 어려움은 전혀 없단다.
자일랜을 경영할 때 한국 여성이, 우리 회사의 변호사로 오게 되었어. 가정 형편이 어려워 서울 여상을 졸업하고, KAL에서 근무하며 방송통신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에,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미국에 유학을 왔어. 뉴욕대학원에서 법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변호사가 된 인텔리 여성이었어. 그 때 그녀를 너무나 사랑해서 결혼했고, 아이를 연년생으로 셋을 낳으면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지. 그 때만 해도 힘든 사업을 정리하고, 많은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여서, 여행도 다니고 좋은 시간을 많이 가졌지. 그런데 행복한 결혼생활도, 살다보면 갈등이 없을 순 없지.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었는데, 자존심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해서 대화가 안 통할 때는 답답하고 힘들었어.
한국에 와서, 강연을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자유로운 사회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전원생활을 하며 조용히 살기를 바랬어. 결국 그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또 한 번 아이들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헤어져야 했어. 아픈 이혼이었지만 지금은 아이들과는 물론이고 애들 엄마와도, 친구같이 잘 지내고 있어.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너무 힘든 결정이었지만, 같이 살면서 도저히 행복할 수 없었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기에 후회는 없어. 지금도 아이들 엄마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달려가서 도와주지. 왜냐하면 내가 사랑했던 여자고, 본인이 행복해야 세 아이들에게도 더 잘할 테니까.